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 고통 속에 피어난 뜻

세종대왕이 한글, 즉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단순한 문자의 창제가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바꾸려는 깊은 뜻이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 자체가, 백성에게 ‘바른 소리(글자)’를 전하고자 하는 왕의 마음을 담고 있다.

당시 사회 현실은 한자로 쓰인 글이 중심이었고, 한자를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자기 생각과 말을 글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세종은 이것을 “말하고자 하나 뜻을 펴지 못함(欲言而不得意)”으로 표현하며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든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이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건강 악화, 내외 정세의 긴장, 반대 세력의 압박 등이 있었고,
  • 특히 유교 지식인들 중에는 언문(한글 같은 새 글자) 창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종은 이들을 설득해야 했고, 창제 작업을 지속하는 데 심리적·정치적 부담이 매우 컸다.
  • 수년간의 연구와 검토, 집현전 학자들과의 협업, 세부 원리의 정립 등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세종은 한 개인으로서 왕으로서, 과학자이자 이상가로서 그 무게를 견디며 훈민정음을 완성한 위대한 인물이다.

세종은 또한 한글을 원리와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해례(解例) 부분이다. 해례는 제자해(制字解)·초성해·중성해·종성해·합자해 등 문자 구성 원리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실제 사용할 단어 예시(용자례)를 제시하는 부분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2

훈민정음 해례본: 그 의미와 구성

훈민정음 해례본(훈민정음 + 해례)은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에 반포된 목판본이며, 현재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례본은 크게 예의(例義) · 해례(解例) · 정인지 서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예의(例義)

  • 여기에는 세종이 친히 지은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새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기본 음가 배열, 운용법 등이 간략히 적혀 있다.
  •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으며, ‘우리말은 한자와 통하지 않으니 새 글자를 만드노라’는 취지의 문구로 시작된다.

해례(解例)

  • 예의에서 제시한 내용을 더 정밀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며, 제자해(문자를 만드는 원리),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 등이 포함된다.
  • 예컨대, 제자해에서는 글자의 모양이 발음 기관(입, 혀, 이, 목구멍 등)의 모양을 본떴다는 원리를 설명한다.
  • 용자례에서는 한글로 실제 쓸 수 있는 단어 예 123개를 제시하여, 새 글자의 실제 운용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정인지 서문

  • 마지막 부분에서 정인지가 참여한 집현전 학자들의 이름, 반포 연월일, 훈민정음의 우수성 등을 기술한다.

해례본의 구성 자체도 매우 정교하다. 예의는 큰 글씨로, 해례는 작은 글씨로 판각하였고,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이 독립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판심제(책의 중심 제목)도 부분마다 구분하여 새긴 점이 특징이다.읻

이 모든 것은 세종이 단순히 글자를 퍼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문자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랐다는 뜻을 보여 준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3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SBS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는 이도(세종대왕의 본명)가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는 과정을 정치, 권력, 인간 갈등을 배경으로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드라마의 제목은 『용비어천가』 2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에서 따왔다. 여기서 ‘뿌리 깊은 나무’는 조선의 근본, 즉 ‘백성을 위한 나라’라는 세종의 철학을 의미한다.

드라마는 세종(한석규)과 무사 강채윤(장혁), 정기준(윤제문), 내금위장 무휼(조진웅), 소이(신세경) 등을 통해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갈등과 이상, 그리고 사상의 대립으로 잘 풀어냈다.

여기서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은 카리스마보다 인간적 고뇌로 가득한 모습이다. 그는 “한글을 만든 왕”이기 이전에, “백성을 위해 고통을 짊어진 인간”으로 묘사된다. 아들의 죽음, 권력의 모순,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끝내 한글을 완성해 내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군의 위대한 얼굴 뒤에 숨겨진 ‘고뇌의 인간 세종’을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는 실제 역사 기록과 허구적 요소를 섞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 비밀 조직 대립 구도: 드라마에는 ‘천지계원’(세종이 한글 창제를 추진하는 비밀 조직)과 ‘밀본’(한글 반포를 방해하거나 권력 재편을 꾀하는 비밀 조직)이라는 설정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극적으로 풀어 가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 정기준과 권력 투쟁: 드라마의 주요 대립 축은 정기준(밀본의 핵심 인물)과 이도(세종) 사이의 철학적, 정치적 충돌을 다루었다. 권력, 질서, 기득권, 백성의 목소리 등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 인물 내면과 갈등 강조: 세종(이도)를 단순한 성군으로만 그리기보다, 고뇌하고 갈등하며 선택해 나가는 인간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글 창제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맞물리는 어려운 선택임을 부각시켰다.
  • 상징과 은유 사용: 드라마는 문자 창제 과정을 단순한 언어 혁신이 아니라, 정체성, 권력 구조, 민본 사상, 민족 정체성의 투쟁으로 확장시켜 보여 주었다. 드라마 제목 ‘뿌리 깊은 나무’도,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은유로, 튼튼한 언어 뿌리(한글)를 중심에 두려는 뜻도 담겨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4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외롭고 힘든 고통을 밟고 나온 한글 / 광평대군의 죽음

역사는 완성된 결과로 말해주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갈등, 저항, 희생이 있다. ‘위대한 일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이 뒤따른다’. 한글창제 반포를 할 당시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이 천연두로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광평대군은 1425년 (세종 7년)에 출생한 본명은 이여(李璵)로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도 6째 아들로 총명하고 문무에 능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학문을 즐기며 효심이 깊어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어린 나이에 광평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심한 슬픔과 우울에 빠졌다. 이는 그의 말년 건강 악화와 고독감, 그리고 한글 창제 당시의 고통과도 겹쳐 세종의 내면적 고뇌를 깊게 만든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시기(1443~1446)는 바로 광평대군이 병들고 죽기 직전의 시기이기도 하다. 세종은 광평대군의 죽음 이후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으나, 한글 창제의 완성과 반포(1446년)는 그런 고통을 이겨낸 결실이 되었다.

조선의 반대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빛, 한글의 탄생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시기는 ‘지식은 곧 권력’이던 조선 초기, 문자와 학문이 철저히 양반 사대부 계층에 의해 독점되던 시대였다. 그 속에서 세종은 ‘백성에게 글을 주겠다’는 생각 하나로, 말 그대로 왕 한 사람이 온 조선의 체제와 맞서 싸운 것이다.

    세종대왕은 왜 몰래 글자를 만들어야 했는가?

    훈민정음 창제는 1443년에 완성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 당시 조선은 철저히 성리학 중심의 유교국가였고, 학문과 언어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대사상(事大思想)’이 지배했다.

    한자(漢字)는 곧 문명의 상징이었고,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로 여겨졌던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곧 중국의 문화 권위에 도전하고, 사대부의 지식 독점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거센 반발이 뒤따랐다.

    당시 사대부들은 “성리학 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시도”라며 반발했고, 심지어 세종의 측근들도 “왕의 명이 지나치다”고 만류했다.

    대표적으로 최만리(崔萬里)와 함께 한 대신들은 세종에게 이렇게 반박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도 굳이 글을 만들면, 오랑캐가 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중국 글이 있는데 어찌 새로 글을 만들겠습니까?” 이 말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세종의 시도가 조선의 정체성과 문명 수준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라고 공격하는 매우 강한 정치적 언사였다.

    세종은 이 반대에 맞서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를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했다.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도 오직 극소수, 즉 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몇몇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그들조차 왕의 명을 따라 ‘비밀 프로젝트’처럼 움직여야 했다.

    한글은 단지 지적 창조물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태어난 사랑의 언어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한글은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였다.

      왕이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건 싸움

      세종의 싸움은 단순한 ‘언어학적 실험’이 아니라, 사상과 권력의 전쟁이었다. 그는 병든 몸으로도 대신들과 밤새 논쟁을 이어가며, “백성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어찌 옳으냐”라고 외쳤다. 세종에게 한글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 즉 ‘백성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신념의 결실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도 계속된 저항

        훈민정음은 1446년 반포되었지만, 이후에도 한글은 한동안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천대받았다. 사대부들은 여전히 한자를 고수했고, 심지어 한글 사용을 죄악시하기도 했다. 세종 사후에도 한글은 궁중 여성이나 하층민을 중심으로만 퍼졌고, 정식 학문이나 공문서에서는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씨앗은 뿌리를 내렸고, 백성의 언어로서 자라나 민족의 정신이자 세계적 문자로 꽃피우고 있다. 이는 세종대왕이 말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의 진짜 의미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5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깊은 뜻은?”

        세종대왕은 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라기보다, 백성을 위해 마음을 쏟은 철학자이자 학자, 그리고 휴머니스트였다. 세종대왕은 단순히 문자 하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의사소통의 길을 열고, 민본 사상을 실천하려 한 지도자였다. 세종대왕의 깊은 뜻은 언어의 평등, 자기 목소리의 구현, 민족 정체성의 강화, 문화 발전의 토대 구축 등이었다.

        세종대왕은 무(武)의 길이 아닌 문(文)의 길을 택했다. 그는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 지식과 도리, 그리고 소통으로 백성을 이끌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불안정했던 사회 속에서, 그는 “나라의 근본은 백성에게 있다(民爲邦本)”는 믿음으로 나라의 뿌리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민본사상(民本思想)이었다.

        세종대왕이 한글,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이유 또한 그 민본사상에서 비롯된다. 백성들이 한자 때문에 글을 읽고 쓸 수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뜻을 전하지 못하는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그는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로 인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했다. 이 한 문장 속에는 세종의 인간적인 연민과 백성을 향한 사랑이 모두 담겨 있다.

        훈민정음은 단지 ‘문자’의 발명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평등을 실현한 혁명이었다. 글을 읽을 수 없었던 백성에게 글을 주었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적 소통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글은 문화적·정치적 전환점을 넘어, ‘소통의 혁명’이자 인권의 언어였다.

        세종대왕은 권력으로 나라를 세운 왕이 아니라, 지식과 언어로 백성을 살린 왕이었다. 그는 “말과 글로 세상을 다스린 성군”으로서, 조선의 뿌리를 깊게 내린 진정한 철학실천가였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작 세종대왕

        민본사상은 유교 경전 『서경(書經)』의 “백성이 하늘의 근본이다(民惟邦本, 本固邦寧)”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조선의 통치 이념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들은 이를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행정적 지침 정도로 이해했다. 반면 세종대왕은 백성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인정했다. 그는 백성이 단순히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과 공감의 주체임을 분명히 했다.

        그 철학이 가장 명확히 드러난 사례가 바로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은 백성의 삶 속 언어를 주목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서문은 단순한 언어 차이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층의 단절된 의사소통을 통렬히 인식한 선언이었다. 그는 문자 해독 능력의 유무가 곧 지식의 격차이자 권력의 불평등을 낳는 현실을 보았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단지 언어학적 발명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해방의 행위, 소통의 혁명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는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말은 문자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넘어, 철학적 선언이다. 세종은 언어의 접근권, 즉 오늘날로 치면 ‘표현의 자유’와 ‘정보 접근의 권리’를 국가의 책무로 인식한 최초의 지도자였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 이방원의 잔혹한 무치주의를 극복하고 문치주의를 통해 권력의 폭력성을 제어했다. 그는 형벌보다 교화를, 무력보다 설득을 우선시했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세종은 “형벌은 일시의 억제이나, 교화는 천년의 근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통치의 패러다임을 ‘강제에서 설득으로’, ‘지배에서 공감으로’ 옮긴 결정적 발언이었다.

        그가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문과 토론을 장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집현전은 단순한 연구 기관이 아니라, 왕과 학자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공론의 장이었다. 세종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신하를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간언을 존중하며, 그것을 통해 더 나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모습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합의에 기반한 의사결정’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또한 정보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천문, 의학, 음악, 농서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여 백성에게 보급한 것은, 지식이 권력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지식의 개방은 곧 사회의 계층 구조를 완화하는 도구였다.

        세종의 이런 철학은 후대의 정치 사상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의 ‘탕론(蕩論)’과 같은 개혁 사상은 세종의 민본정신을 계승·확장한 것이며, 근대 이후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민주주의의 논리적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세종의 철학은 ‘민본의 왕도정치 → 공감의 소통정치 → 민주적 주권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사적 가교로 평가된다.

        한글은 단지 문자 체계가 아니라 그것은 인간 존엄의 언어이며, 민본이 민주로 이어진 세종대왕의 영혼의 결실이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나무로, 우리의 말 속에, 우리의 마음 속에, 굳건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