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배우기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통일을 이룬 국가는? 베트남

【해설】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1976년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동서독은 1990년에 통일을 이루었다. 남북 예멘 역시 1990년에 첫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예멘 내전(1994년)이 있었고 남예멘 지역에서 재분리 운동을 겪고 있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현재 양국은 통일에 대한 생각도 각각 다르다.

2. 중국은 1국가 2체제(일국양제)의 방향으로 대만과의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3.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이 단체’의 활동을 소재로 제작하였다.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시도한 이 단체의 이름은 ‘조선어학회’이다 .

【해설】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려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대한민국 역사 배우기 2

4.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개성공단 외에도 경제특구를 더 짓기로 합의를 하였다. 북한 측이 서부전선 일대를 양보하기로 했던 이 지역은 어디인가? 해주

5. 쿼드(QUAD)는 인도·태평양전략의 핵심 국가인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고 있는 비공식 안보회의체이다.

6.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제3자 제재)은 미국의 독자제재로 제재 대상과 거래를 하는 제3국의 개인, 기업, 금융기관 등을 제재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제3자 제재)은 제재 위반 사항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나 단체라면, 미국 법의 직접 대상자가 아닌 제3국인에 대해서도 적용되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선 제재로서, 제재 대상 뿐만 아니라 그와 거래하는 제3자들에 대하여 제재를 부과할 수 있어 제3자의 금융거래가 차단되는 등의 레버리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기업 등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자기 자본의 이익률을 높임. (=레버리지 효과, 지렛대 효과)

[정답]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3자 제재)

【해설】2016년 9월. 미국 재무부는 행정명령 13382호에 근거,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관련하여, 단둥홍샹 및 동 회사 관계자 4명이 미국 대북제재 대상으로 지정됨으로써, 이들의 미국내 재산과 이자가 동결되고 미국(인·기업 등)과 의 거래가 금지되었다.

7. 북한의 학교생활

11년 의무교육제도를 유지했었는데, 김정은 시기 12년 의무교육제로 변화되었다.

② 유치원 높은 반(1년)부터 소학교(5년), 초급중학교(3년), 고급중학교(3년)로 구분된다.

③ 담임선생님은 독일, 덴마크처럼 한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④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고 모든 학교의 교복은 모양이 같다. 교복의 구분은 교복모양이 아닌 단추나 배지의 모양으로 학교를 구분한다.

8.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 부들러는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 전략으로 ( 중립화론 )을/를 제안하였다.
【해설】김옥균 등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으켰다가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이후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는 조선 중립화안을 건의하였다.

9. 대한 제국은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제물포와 주변 해역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해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10.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은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을 담은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이기도 하다.

11.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미군정에 의해 한반도의 유일 정부로 인정받았다. => NO

【해설】서울에 들어온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고 직접 남한을 통치하였다. 미군정청은‘미군정만이 38도선 이남 한국에서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은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12. 미·소 공동 위원회는 6ㆍ25 전쟁 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 NO

【해설】미ㆍ소 공동 위원회에서는 한반도 임시 민주 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였다. 6ㆍ25 전쟁 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회담은 제네바 회담이다.

13. 임진강 유역은 홍수 피해가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지형적 특성을 안고 있다. 또한 임진강 상류지역인 북한과의 협조 없이는 근본적인 대처에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2000년 9월 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임진강 수해방지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고 실무협의회, 경추위, 장성급회담 등에서 남북이 공동조사 실시, 홍수 예경보시설 설치, 묘목 제공 등에 합의하기도 하였으나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해설】임진강은 총 연장 254.6㎞이고, 유역면적은 8,117.5㎢이며 그 중 북한지역이 전체의 62.9%를 차지하고 있다. 임진강 유역은 주변 지역의 고도가 낮아 홍수 피해가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지형적 특성을 안고 있다. 2000년 임진강 수해방지 문제가 남북 간에 본격적으로 협의되기 이전까지 1996년부터 1999년까지만해도 임진강 남측지역에서 184명의 인명 피해와 1조 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보았다.

14. 일제는 러·일 전쟁 중인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불법 편입하였다.

15. 6ㆍ25 전쟁 중 정전 회담이 처음 열린 곳은 판문점이다. => NO

【해설】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 회담을 열었다. 이어 1952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6.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의해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었다. 분계선으로부터 쌍방이 각각 2km씩 후퇴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설정된 지역을=> 비무장지대 DMZ 이라고 한다.

【해설】 접경 지역에는 비무장 지대(DMZ), 민간인 통제 구역(CCZ) 등으로 나눠진다. 민간인 통제 구역은 휴전선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의 보호와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을 의미한다.

17. 개성 영통사는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 왕자였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출가해 개성 외곽 오관산에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천년 고찰로, 16세기 화재로 전소한 것을 2002~2005년 남북합작으로 복원했다. 당시 남쪽 천태종은 기와 약 46만장과 묘목 1만 그루, 중장비와 건축 마감재 등을 지원해 2005년 복원을 마무리했다.

【해설】영통사는 1027년(고려 현종 18) 창건된 사찰로,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2년 11월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10월 31일에 복원을 완성했다.

18. 2023년 8월 18일 한미일 공동선언(캠프 데이비드 선언)의 일부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담대한 구상의 목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을 지지한다.
【해설】 2023년 8월 18일 미국 워싱턴 D.C.인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3국은 한미일 공동선언(캠프 데이비드 선언)을 채택하였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한미일 3국 정상이 언급한 것은 캠프 데이비드 선언이 처음이다.

19. 6자회담은 2003년부터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 북한,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이 참여하여 진행된 다자회담이다.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6개국이 참가하는 다자회담이다. 2003년 제1차 회담 이후 2007년 9월의 회담까지 모두 6차례 열렸는데, 모두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4차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미국의 대북 불가침 의사 확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6개 항목의 이른바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였다.

20. 1960년대부터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한 서독의 동방 정책은 동독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실체를 먼저 인정한 뒤 접근하자는 것으로 빌리 브란트 총리가 주도한 정책이다.

【해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은 통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대신 서신 허용, 통행 허용, 가족 방문과 같은 작은 조치들로 먼저 변화를 이끌자는 정책으로 ‘작은 발걸음 정책’으로도 불린다.

21. 다음은 북한의 『조선말규범집』에 기술되고 있는 문장이다.

조선말발음법은 혁명의 수도 평양을 중심지로 하고 평양 말을 토대로 하여 이룩된 문화어의 발음에 기준한다.

【해설】북한의 “조선말규범집”(1988)의 <문화어발음법> 총칙이다. 총칙에는 “조선말발음법은 혁명의 수도 평양을 중심지로 하고 평양말을 토대로 하여 이룩된 문화어의 발음에 기준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22. 광혜원

의사 겸 장로교 선교사였던 알렌은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이 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고종에게 신식 병원의 설립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1885년 2월 29일 재동에 설립된 이 병원은 뒤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고쳐 운영되었다.
【해설】제시된 글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에 대한 설명이다.

23.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다.

【해설】미나미 지로는 제7대 조선 총독(재임 기간 : 1936년 ~ 1942)으로, 재임 시기 ‘내선일체’를 표방하였다.

24. 대공황 이후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소작 쟁의가 확산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총독부는 빈궁의 원인을 한국 농민들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돌리는 한편 농촌 경제를 개선한다는 취지로 1932년부터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1940년 국민 총력 운동으로 흡수되었다. => 농촌 진흥 운동

【해설】농촌 진흥 운동은 1932년에서 1940년까지 조선 총독부가 전국의 농촌을 대상으로 실시한 관제농촌운동이다.

25.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 정부로서 삼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해설】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 정부로서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 사법 기관인 법원으로 구성되었다.

26. 물산 장려 운동은 일제 강점기‘내 살림 내 것으로’등의 구호를 내걸고 토산품 애용을 주장한 운동이다.

【해설】평양에서 시작된 물산 장려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전개하였다.

27. 1920년 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의 전과에 대해 북로 군정서가 임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 사상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1,25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산리 대첩

28. 조선어 연구회는 ‘가갸날(한글날)’을 제정하였다.

【해설】조선어 연구회는 1921년에 만들어진 한글 연구 단체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1928년 기념식부터는 한글날로 고쳐 불렀다.